글로벌 파운드리 부문 1위인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미국에 이어 일본에도 공장 착공을 검토 중입니다. 2위 사업자인 삼성전자와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평이 나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나서야 한다”는 뉘앙스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위치가 메모리 반도체 부문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시장 주도권을 완전히 내줄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합니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입니다. 산업 주도권을 가져가는 대표적인 요인은 속도와 기술입니다. 국내 기업들에 대한 비판은 바로 느린 ‘속도’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이 단순히 반도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전쟁 배경에는 군사력, 즉 실제 ‘전쟁’이 있습니다.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지난 3월 ‘인공지능 발전 전략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눈에 띄는 문구는 “반도체 제조의 가장 중요한 기지가 패권 경쟁국에서 해상 170km 거리에 존재” 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지’는 TSMC를 뜻하며 ‘패권 경쟁국’은 중국을 뜻합니다.
보고서 발표 기관과 제목에는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미래 전쟁이 AI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무인 전투기와 인공지능이 결합돼 여타 항공기와 팀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등 최첨단 기술이 활용됩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5월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을 통해 “미 국방부는 더 큰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미국 국방 핵심은 전쟁 억제력”이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우리 무기가 의문의 여지없지 충분할 떄만 그것들이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현재 미국이 원하는 국방력 수준을 말하자면 말 그대로 ‘초격차’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안보를 강조하는 미국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세계 3대 패권과 팍스 아메리카나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해서 요구되는 3가지 조건은 돈, 에너지, 군사력입니다. 세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팍스 아메리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잡았다는 뜻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금을 모두 미국에 맡기고 전쟁 자금 마련에 나섰습니다. 1944년 미국은 막대한 금 보유량을 앞세워 ‘브레튼우즈’ 체제를 출범시킵니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배경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원유 수출국이었습니다. 금본위 제도 하에 유가는 낮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였고 ‘세븐시스터즈’라 불리는 서방 메이저 석유업체들이 글로벌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1960~1975년)으로 미국 국제수지 적자는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전비 마련을 위해 달러를 찍어내자 달러 가치는 급락하고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위협했습니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일부 국가들이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줄 것을 요구했고 미국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합니다. 기축통화 위상을 지켜야 하는 미국 의지를 고스란히 보여준 대목입니다.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그 유명한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후 이란 혁명으로 시작된 ‘2차 오일쇼크’가 다시 한 번 미국을 위협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에너지정책 보호법’ 아래 원유 수출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중동국가들이 글로벌 유가를 움직이는 ‘큰 손’이 된 배경입니다.
이렇듯 ‘팍스 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사용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만큼 미국이 글로벌 패권을 잡는데 있어 불안정한 시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전 세계에 영향력을 과시해 왔습니다.
골치거리였던 에너지 안보는 셰일에너지 개발을 통해 대응했습니다. 중동 국가 중 미국에 우호세력으로 꼽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가 이전과 달리 냉냉한 기류가 흐르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 틈을 타 중국은 중동 국가들에 위안화로 원유 결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금본위 제도가 막을 내린 후에도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잃지 않았던 이유도 ‘원유 결제 화폐’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호시탐탐 자신들의 지위를 노리는 중국이 여간 불편한게 아닙니다. 돈, 에너지는 물론 군사력 강화도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TSMC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만에 적극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TSMC는 중국시장을 버릴 수 있습니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시장도, 중국 시장도 모두 중요합니다. 특히나 ‘안보’가 걸린 문제니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눈치보기’는 SK하이닉스의 매그나칩 파운드리 인수과정을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매그나칩 파운드리 인수에 후순위 투자자로 참여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매그나칩은 미국 기업으로 과거 중국 기업들이 인수에 나섰으나 기술 유출 우려가 불거지면서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중국 사모펀드가 다시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SK하이닉스는 중국과 파운드리 부문에서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경영권 확보 시 미국으로부터 불합리한 제재를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만큼 SK하이닉스가 이 거래를 두고 상당히 고심을 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시스템 반도체, 구조적 한계 직면…본게임은 이제부터
나이스디앤비에 따르면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는 구조적 한계를 맞은 상황입니다. AI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가운데 대량 데이터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고속 병렬처리가 가능한 고성능 컴퓨팅이 요구됩니다.
기존 반도체 기반으로 AI 서비스 구현을 위해서는 대규모 서버와 연동이 필수적입니다. 이 때 수많은 반도체가 필요하고 전력 소모도 상당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뉴로모픽 반도체가 시스템 반도체의 미래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종합 반도체(IDM) 방식 제조가 가능하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생산 특성상 설계와 파운드리 등이 분화돼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IDM이며 TSMC는 파운드리 전문기업입니다. 각 기업이 향후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중국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단순 반도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정치적, 외교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이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1000억원 규모 팹리스 펀드 조성을 발표했습니다. 팹리스 업체와 협력을 강화하고 기술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글로벌 주요 팹리스 업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육성에 따른 기술력 확보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투자 결정이 느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현 상황이 전개되는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기업은 물론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전체가 중대한 기로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입니다.